천년학 (2007)

 이청준 씨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다.

왼쪽의 백발이 성성하신 분이 소설가 이청준 선생님이다.



 이 무슨 뜬금없는 소리고 하니, 천년학을 보다가 그의 얼굴이 나왔기에 너무도 반가운 마음에 하는 말이다.
 아니 대체 반가운 마음에 이런 독언을 퍼붓다니 그것도 우스운 거 아닌가마는, 이렇게 영화의 카메오로나마 만난 것이 반갑더라도, 이청준의 작품을 개인적으로는 좋아하지 않는다.

 국민공통교육과정의 고교 1학년(10학년) 국어책에는 그의 '눈길'이 수록되어있다.
 뭐랄까, 에둘러 빙- 돌아가는 듯 한 그의 말하기에 내용보다는 답답하다 못해 괜스레 화가 났달까. 아무튼 멋대로 이청준을 충청도 태생일거라는, 지역적 편견을 가진 시각으로 추측해 버렸던 그 당시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성미가 급해서인지 느릿느릿한 그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대화와 그걸 꼭 닮은 글의 전개에 짜증이 북받쳐 온 것은 비단 '눈길'을 읽을 때만이 아니라, 명작으로 손꼽히는 ≪당신들의 천국≫을 읽었을 때에도 였다. 그 이후로 그의 작품은, 모의고사와 문제집에 나온 지문을 제외한다면, 이청준의 작품을 따로 읽은 적도, 읽은 기억도 없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음악가인 양방언의 음악을 들어보자는 심정 반, 거장이라 불리는 임권택의 작품을 같이 볼 이가 없었다는 아쉬움 반 해서 뒤늦게 본 '천년학'은 그렇게 반가운(?)이의 얼굴로 시작되었다.


 이청준의 '선학동 나그네'가 원작인 '천년학'은 그렇게 이청준의 다른 작품들과 닮아 있었다. 그건 아마 임권택도 한 몫을 했으리라. 기억이 맞는다면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한 씬의 길이가 긴 편이라 - 이걸 롱테이크라 했는지 롱샷이라 했는지 그건 가물가물하다 - 호흡이 길다 어쩌다 하던 걸 줏어들은게 아마 '춘향뎐'이 나오던 때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렇게 두 '느림보'가 만났으니 영화는 시종일관 느리다. 서두르지 않고 찬찬히, 이야기가 펼쳐진다.


 송화와 동호의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 속에서 느린 템포로 흘러가는 이야기. 줄거리는 참으로 단순하다.
 어쩌면 그 단순한 이야기를 굽이굽이 늘여놓는 것이 이청준의 장점일지도 모른다. 왜, '눈길'이 그렇지 않았는가. 노모가 과거에 주인공이 떠나는 눈길에서 얼마나 슬퍼했는가, 그걸 주인공이 깨닫는 이야기. 여느 장편소설이라면 짤막한 몇 줄의 대화와 몇 줄의 글로도 충분히 극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을 내용인데, 그걸 늘여서 싫었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이미 잔잔한 여운을 주며 마쳐야 된다고 스스로 생각해 놓은 시점이 지나고서도 계속 이어지던 이야기가 구질구질하다고 느껴서였을까.
 생각으로 채우기 좋은 느린 풍경의 흐름 속에서,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지는 순간이었다.

참으로 호사스런 죽음이다. 친일로 재산을 축재한 이에 대해, 영화는 특별한 평을 내리지 않는다.


 역시 눈여겨 볼 것은 영상미인데, 공들여 찾아다닌 것이 느껴지리만치 국토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임권택의 다른 작품을 보지 못하고 -카더라 류의 말만 들어서 뭐라 내 입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뒤에 세우고 멀리서 찍어 인물을 작게 만드는 것이 임권택의 주특기가 아닌가 싶다. 아무래도 3D기술의 힘을 빌린 것이겠지만, 매화꽃잎이 눈처럼 내리는 장면이나 송화와 동호를 암시하는 듯 한 한 쌍의 학이 학산을 뒤에 두고 나는 장면은, 아니 그 외에도 수많은 촬영 장소들은 아름답다.
 영화의 평가에서 무얼 기준으로 삼아야할지 모르는 나 같은 무지랭이에게, '보는' 영화가 이토록 눈을 아름답게 해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아마 이걸 '영상미'라 부르는 게 맞기를 바란다.


 소리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양방언이 들려주는 음악은 정말로 전형적인 그의 음악이었다. 먼데서 들려오는 태평소의 울음, 서양악기와 조화를 이루려 노력하는 국악의 사운드. 그건 언제나처럼 그 나름대로 훌륭했다, 그건 분명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소리', 즉 판소리인데, 그것은 무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부끄럽게도 '국악'보다 서양의 옛 음악들을 더 많이 듣고 더 많은 감동을 느껴온 스스로를 탓할 수밖에 없다만, 그래도 하나 말하자면, 소리는 훌륭했다. 그것은 '아름다웠다'라기보다는 '훌륭했다'란 표현으로 말해야 옳을 것만 같다. 실제의 명창이 부르는 적벽가는 비록 부분이었지만 왠지 모를 신명이 느껴지고, 송화의 토해내는 심청가는 그 애절함이 닿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왠지 모를'이나 '같았다'같은 표현으로, 그 나름 좋았다 식의 중고등학생 감상문 결말을 내는 게 찜찜하지만, 이정도로만 해두자.

그가 송화의 눈을 멀게했는지,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한'이 그에게서 두 주인공에게 옮아가는 과정을 보여줄 뿐이다.

단심이도 끝까지 동호를 사랑했었다. 한을 받은 인물이 다른 이에게 한을 남기는, 그런 이어짐이다.


 인물들은 하나같이 한을 가슴에 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평생을 두고 그리는 이들을 만나지 못하는 두 주인공은 물론이거니와, 실패한 소리꾼이나 사랑하는 이에게 버림받고 미쳐버린 되다만 소리꾼들은 그래서 슬프다. 결국은 누구하나 행복한 인물이 없다. 참 잔인한 영화 아닌가. 이쯤 되면 이건 우리네 삶의 진실 된 반영이라는 리얼리즘을 넘어, 기구한 운명을 가진 이들만 모아놓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그렇구나. 따져보면 이 모든 슬픈 이들은 소리꾼이다. 물론 송화를 줄곧 짝사랑하던 주막 주인을 뺀다면 주요 인물들은 다 소리꾼인 셈이다. 아니, 하긴 주막 주인도 '소리'에 그 사연이 얽힌 사람이라는 걸 감안하면, 소리란 이렇게 슬픈 이들과 함께한다는 섣부른 일반화도 가능하겠다.
 이것이 임권택이 말하고 싶던 '한恨'인가.


 그렇게 슬픈 이들의 이야기는 결국 슬픈 마무리를 짓는다. 그렇게 몇 번이고 만났지만, 두 사람이 가슴속 깊이 감춰둔 무언가를 - 그것이 무엇인지, 서로에 대한 사랑인지, 단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인지, 그 모든 것이 '승화'되었다고 진부하게 표현될 한인지 관객이 멋대로 추측할 수밖에 없는 - 내비쳐 풀어낸 적이 없다는 점에서 결국은 진정으로 만나지 못한 두 주인공이, 극의 마지막에 이런 재회를 한다는 것이 어쩌면 행복한 결말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그것이 동호의 상상이거나, 주막 주인의 눈에 비친 환상이거나, 임권택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찰나의 꿈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런 행복해야할 장면에서 가슴 시리게 되는 까닭은, 그 둘의 구구절절한 사연 탓일까. 아니면, 이뤄질 수 없는 이런 만남을 꿈으로밖에 볼 수 없는 아쉬움일까. 그도 아니라면,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바로 그 적절한 한 글자, '한'때문일까. 슬픈 의문을 남기며 그렇게 '천년학'은 소리에 감싸여 멀어진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두 마리 학이 참으로 사이좋게 난다.
 닿을 수 없는 저 먼 곳으로 멀어지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블로그를 쓴다.
싸이 다이어리를 사용하기에는 그 한계가 너무 많아 이렇게 기록을 남긴다.
행여 그 모든 감정이 잊혀질까 두려워.
by redeyes | 2007/12/16 00:03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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